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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예

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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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사진출처 식품외식경영)

냉면은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성장했다. 상품 화폐 경제가 커가면서 식문화도 발전했다. 지금 냉면 하면 평냉, 함냉을 떠올리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냉면 하면 평양과 진주였다. 모두 물산들이 풍부하고 교방문화가 발달한 도시였다

조선 후기 냉면거리가 있을 정도로 냉면을 많이 먹었던 평양은 고려시대부터 주요 거점 도시로 기능했다. 평양은 사신이 머무는 통로로 물산이 풍부했으며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도 도시 외곽에서 많이 자랐다. 이 지역을 다스리는 평암 감사는 당대 가장 끗발 있는 관직이었다.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평양에는 마시고 즐기는 교방문화가 발달했다. 전국 기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평양으로 모모여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냉면이 시원한 여름 별미로 꼽히지만, 당시는 선주후면이라 하며 밤늦게 술을 마신 뒤 마무리로 즐기는 음식이었다. 교방문화와 함께 냉면이 성장한 이유이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진주 역시 예부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했다. 경상남도의 조세를 모아 바다를 통해 서울까지 운반하는 가산창이 있어 일찍이 장시가 발달했다. 19세기 초 진주에서 열리는 장시만 해도 13개에 달했으며, 관아 기생들도 냉면을 배달시켜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다

 

단원 김홍도 단원풍속화첩중 주막(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 시장발달

 

냉면은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음식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황윤석이 쓴 이재 난고에는 1768년 과거시험을 본 다음날 일행들과 냉면을 시켜먹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유원의 임원 필기에는 순조가 즉위초 신하들과 달구경을 갔다가 냉면을 사 오라고 시킨 기록도 있다. 

 

순조 대는 세도정치가 득세해 조선의 국운이 점차 기울던 시기였으나 전국에 1600여 개의 장시가 성행할 정도로 경제가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의 냉면에도 지금의 성장한 경제와 식문화가 녹아있다

물냉 대 비냉, 회생 대 육냉, 평냉 대 한냉 등 냉면 논쟁은 경제성장의 발판으로 다양하게 뻗어나간 식문화를 보여준다. 사실 이토록 다양한 변주의 출발점에는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가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이북에서 건너온 많은 이들이 냉면을 각 지역에 전파하며 그 지역에서 찾기 쉬운 재료로 냉면을 만들었다. 까나리 액젓을 사용한 백령도 냉면, 미군의 원조 밀가루에서 탄생한 부산 밀면, 함흥의 가자미를 명태로 바꾼 속초 회냉면 등이다

 

오늘날 냉면은 아픈 근대사를 딛고 더 멀리 뻗어 나가고 있다.

 

짜지도 달지도 않은 화장기없는 민낮을 보여주는 냉면(kbs)

냉면은 개인적으로 너무 애정 하는 음식이다. 오랫동안 정성스레 고아진 육수에, 시원한 냉면을 먹고 있으면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거기다 고기까지 감아서 먹는다면 말해 무엇하랴.. 냉면을 먹을 때마다 되게 트렌디한 한국인의 대표 소울 음식을 먹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름에 내가 좋아하는 냉면을 주제로 글을 쓰지 않으면 뭔가 직무 유기한 느낌이 들어 꼭 쓰고 싶었다.

다음은 냉면에 관한 내 마음에 쏙 드는 문구를 발견하여 ,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냉면은 청랭담소한 음식이다

냉면은 맑고 차갑고 담백하면서 소박한 음식이다

보이지 않는데서 정성을 들여서 소박함 속에 마음이 깃든, 기다림이 깃든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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